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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스토리

마우스구이를 먹어보신 적이 있나요?

천억선한기업가 2018. 10. 3. 09:30

이 야기를 하게 되면 좋아할 사람도 있겠지만 싫어할 사람도 종종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굳이 강조하자면 이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연히 친구 이야기이다. 그 친구는 외딴 시골에서 태어났다. 때는 1980년 전후 전기가 마을에 처음 들어와 TV를 보게된 게 초등학교 5학년이므로 나이 대를 대강 짐작해 보시기 바란다. 그 시골 깡촌 마을에는 참으로 희안한 음식이 한가지 있다. 짚불 구이 요리이다. 이 요리를 하려면 먼저 재료를 확보해야 한다. 요리 재료를 확보하기 유리한 시기는 계절적으로 늦가을, 벼 추수가 끝난 이후부터 봄까지가 주로 해당되지만 물론 사시사철 먹을 수는 있다. 대부분 이 동네 주민들은 벼를 탈곡하고 볕짚을 소 여물로 먹이기 위해 집 안마당에 쌓아둔다. 날씨가 쌀쌀해지는 계절 오전에, 또는 눈내린 겨울 한낮에 안마당의 짚단을 가만히 보면서 툇마루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따스한 양지 햇살을 즐기고 있으면 눈 앞의 짚단 속에서 ‘부스럭부스럭’ 어떤 움직임이 감지된다. 그러면 나의 친구는 마루 옆에 미리 준비해 둔 나무 몽둥이를 들고 살며시 짚단에 접근하여 그 움직임이 감지된 위치를 정확히 한방에 ‘얍’ 가격한다. ​

이 놈은 몽둥이를 맞고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 나와 기절해 있거나 아니면 짚속에서 대부분 사망한다. 이 때부터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후 작업은 속도를 내야한다.재빨리 잔불이 남아 있는 부억 아궁이에 잘마른 짚을 크게 한 줌 쥐고 가서 불 피울 준비를 한다. 요리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거나 하면 당신의 상상력이 상신을 매우 불쾌하게 할 수도 있으니 대충 생략한다. 가죽을 벗겨낸 그 요리 재료를 석쇠에 끼워 넣어 두고는 빠른 속도로 짚 불을 피운다. 짚불은 불이 확 펴올라 살짝 사그라 들 때 열기가 가장 세다. 친구는 물론 재빨리 그 열기로 이놈을 굽늗다. 친구가 이 요리를 먹기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가는 소금 또는 고추장이 전부이다. 그 맛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구이의 최고봉이다. 어떻게 증명하냐고? 나도 모른다. 그저 친구의 주장일 뿐이다. ​

당시는 매우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겨울에 추위를 산속의 산림을 헤쳐서 땔감을 얻어야만 하는 시기였다. 1970년대의 권력의 집행자들은 나날이 늘어가는 민둥산을 수수방관 할 수 없어 당연히 그 권력이 평소에 하듯이 물리력에 의존 했다. 그 동네에도 잘 빠진 근무복에 칼같이 주름을 잡고 신참 경찰이 의욕에 차서 순찰을 나왔다. 집집마다 뒷곁에 숨겨둔 장작과 소나무 낙엽 더미는 온전히 자신의 나신을 내놓고 집주인의 법률적 몽매함에 한탄해야 하는 순간이다. 비상이다. 동네 이장 주최로 긴급 대책 회의를 추진하고 회의 후 농네 어르신 몇 명이 작전 수행에 들어간다. 우선 경관 나으리를 제법 그럴싸한 경관적 뷰가 있는 집의 툇마루에 앉히고 술과 안주를 내어온다. 물론 당연히 안주는 이 짚불구이 몇마리..."우선 이거 막걸리 좀 주욱 드세요. 산등성이를 6개나 넘어오셨으니 목이 좀 마르시지요?" 경찰은 순박한 시골 인심에 감동하여 한마디 합니다. '거 참 이거 먹어도 되나? 이러면 안되는데... 목만 살짝 축이지요. 그런데 안주가 참 맛있네요. 무슨 새 구이인지요?" 이러면 동네 이장께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맛나지요? 우선 주욱 한잔 더 드시고... 이 동내에서만 잡히는 새인데 이름을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간에 경찰은 막걸리 알싸한 맛과 그 구이의 찰진 고소함에 입맛 다시며 그 마을을 대충 둘러보고 주민들에게 가벼운 훈방조치를 하지요. '가능하면 너무 딱딱 긁어서 티나게 산림을 해치지는 마시고요, 적당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시절이 시절이고 가난이 가난인지라 먹고 사는 문제가 그리 쉽지만은 않은 시절이다. 풀뿌리 나무껍데기 먹다가 단백질이면 굼벵이를 포함한 뭐라도 먹던 시절이니 특별히 이상한 취향의 몬도가네식 음식문화는 더더욱 아닌 것이다. 어차피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 시절이니 믿지 못하겠으면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