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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 & 마케팅

나는 ‘꼰대’인가?

천억선한기업가 2018. 9. 12. 08:31

답은 ‘생각보다 많이 그런 것 같다’이다. 꼰대는 국어사전에 1.은어로 ‘늙은이’를 이르는 말 2.학생들의 은어로 ‘선생님’을 이르는 말이다. 다행이도 이 사전 정의에는 요즘 꼰대에 해당되지 않는다. 요새는 부장 직급 정도를 꼰대로 보니 꼰대는 중년남자이지 늙은 어른이 아니다. 아니 꼰대들을 늙은이로 받아드리기엔 밤낯으로 너무 팔팔한 사람들이다. 또, 위키백과에서는 추가로 '자기의 구태 의연한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이른바 꼰대질을 하는 직장상사나 나이 많은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정의 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일견 나도 꼰대일 가능성이 상당히 있다. 틀림없이 나같이 주장이 상당히 강하고 말도 많이 하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리고 간혹 틀린 것을 옳다고 주장하며 생고집 피울 때도 적잖이 있어 나도 꼰대 기질이 좀 있는 것 같다.

https://namu.wiki/w/%EA%BC%B0%EB%8C%80​​


정의야 그렇다 치고, 이와 별도로 저 나름대로 꼰대를 추가로 정의해 보자면 ​'과거는 아름답다'와 '각색된 과거의 성공스토리'를 강요하는 어른 남자로 한번 생각해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나온 삶에서 실패했거나 그리 당당하지 못했던 사례와 같은 나쁜 기억들은 망각이라는 뇌의 순화장치를 통해 정제를 다 해내버린다. 그리고 남은 그 나쁜 기억 일부와 별로 중요하지 않게 행했던 그렇고 그런 행위의 기억은 '아름다운 성공스토리'로 미화시켜서 기억의 동굴 속에 깊숙히 간직한다. 그리고 그 누적된 성공스토리의 기준으로 현재를 다시 재단하고 평가하고 의견을 제시한다. 그래서 우리가 꼰대라고 정의한 '부장님'들은 그 자신만의 기준에 맞춰 후배 직원이나 나이 어린 사람들을 어떤 틀안에 가두려고만 한다. 그 틀이라는 것이 즉 '과거의 성공 스토리'이다. 자기보다 늦게 출근하는 후배를 질타하거나, 어떤 창의적인 방식(그 분에게는 낯선 방식)으로 일을 하거나, 논리정연한 의견을 표명하거나 하는 모든 행위들은 꼰대들에게는 사회적 성공을 저해하는 요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눈에 거슬리는 나쁜 행위로 보인다. 꼰대가 젊었을 때는 상사보다 일찍 출근해 '성실함'을 증명해 보여야 했고-그래서 회사 조직에서 인정받았고, '상명하복, 순응, 순리대로 살아간다'라는 언어에 응집된 것처럼 손바닥의 지문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부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으며-그래서 상사에게 인정받았고, 내 톡톡튀는 아이디어를 상사에게 바치며 모든 것을 상사의 공으로 돌린 덕에 지금의 '부장'이 되었고-그래서 승진해왔고... 이런 성공스토리의 누적이 그 꼰대를 만든 것이다. 슬프지만 아픈 현실이다.


꼰대의 6H 원칙이 있다고 한다. "Who: 내가 누군줄 알아?, When: 우리 때는 말야~~~, Where: 어디서 감히~~~, What: 네 놈이 뭔데~~~, Why: 내가 그걸 왜~~~, How: 어떻게 나한데~~~". 이 모든 문장의 기본 원칙은 '완성된 나'와 '미완성의 너'를 기준으로 정의가 되는 것이다. 오만방자함이 절로 느껴지는 대화체들이다. 위 사진 출처에 대해 여기 링크를 하나 걸어드린다: 꼰대​ 그렇다면 이렇게 인정받지 못하는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여기서 해결책으로 '사고의 유연성'이라는 대명제를 던져 보고자 한다. 과거 성공의 스토리는 결국은 '그렇게 해야 맞다'라는 통계적 경험치 이외에는 논리적 근거가 전혀 없다. 그래서 꼰대식 사고에는 '내가 해봐서 말인데~~~" 같이 이런 경험적 판단이 100% 성공을 결과한다는 섣부른 고정 관념으로 자리잡아져 있는 것이 다반사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꼰대 자신은 충분히 실패했고, 충분히 당당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문제를 만들었던 과거의 행위를 잘 각색해 성공스토리로 만든 가짜 누적 데이타로 스스로 자만의 틀 속에 갇힌 것이다. 꼰대가 하는 지적질과 아집은 이렇게 만들어진 경직된 사고가 불러들이는 비정상적 해위인 것이다. 따라서 꼰대라는 소리를 그 나마 좀 덜 들으려면 어떤 사안에 대해 좀 더 open mind로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물론 나이가 지긋해서 '나도 틀릴 수 있다'는 가정을 해야한다면, 살아온 인생(짠밥)의 경험치에에 대해 근본적으로 부정을 해보라는 말과 같기 때문에 당연 저항이 있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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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後生而可畏(후생이가외)라는 말이 있다. 즉, 후배들이 가히 두렵다. 후배는 선배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많으므로 두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출처 : 子曰 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자왈 후생가외 언지래자지불여금야 ; 공자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가외하니, 후배가 오늘의 우리와 같지 않음을 어찌 알겠는가?’ 했다.)<논어論語 자한子罕>[네이버 지식백과]
더 쉬운말로 '청출어람'이란 말도 있다. 후학들은 당연히 우리보다 식견이 더 나을 수 있다고 그냥 인정해 주고 대해보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특별히 손해가 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적은 것을 투자해 큰 것을 얻는 '전략적 유연성' 아니겠는가?